오대산 노인봉 등산로에서 느껴본 화전민의 자취

우리 나이로 60이 되었다. 벌써 60이라니? 순식간이란 생각도 들지만, 죽을 고비도 있었던 짧지 않은 세월이었다. 어떻게 살았을까?

어릴 때부터 눈이 나빴다. 맨 앞에 앉아 칠판 글씨가 안 보일 정도로. 오징어 게임, 비석 치기, 땅따먹기 등 운동장에 금 그어놓고 놀던 놀이가 많았던 그 시절, 그어놓은 금이 선명하게 보이지 않았던 터라 혼자 노는 걸 더 좋아했다.

그래서 책에 매달렸다. 책조차도 부족했던 시절 책이라면 닥치는 대로 읽었다. 동네 형, 누나가 쓰던 교과서, 만화책, 학교에서 판매하던 어깨동무, 어린이 자유 등…. 글 쓰는 것도 좋아했다. 그림일기, 일기, 반공 글짓기, 웅변 원고.

4년 전 위암 판정을 받고 어이쿠 싶어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여건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당일치기로 갔다 올 수 있는 원주 인근 산을 올랐다. 치악산, 감악산, 명봉산, 덕고산, 태기산, 어답산, 운무산, 독재봉, 오대산, 노인봉, 구봉대산, 계방산, 제비봉, 발왕산. 등산하면서 산에 담긴 역사와 유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뭐 하나 잘한다고 내세울 만한 건 없지만 책 읽고 글 쓰는 건 꾸준히 좋아했다. 치열하게 매달린 건 아니어서 특기랄 수도 없는 취미 정도다. 위암 판정 후 시작한 등산도 마찬가지다. 100대 명산 등반을 꿈꿀 정도는 아니고, 여건과 형편 닿는 만큼만 올라가자 다짐한다.

60 나이가 되었다고 달라질 건 별로 없다. 지금까지 살아온 모습처럼 살아갈 테니까. 그래도 마음속 다짐은 한다. 꾸준히 산에 오르고 책도 읽고 글도 쓰자. 산 이야기, 책 이야기, 살아온 이야기 씨줄과 날줄 삼아 글로 엮어가 보자. ‘산·책·글’이란 타이틀 걸고.

올해 처음 찾은 산이 오대산 노인봉이다. 평창 대관령면과 강릉 연곡면을 연결하는 진고개 정상에서 탐방로로 올라가면 광활한 고위평탄면이 펼쳐진다. 해발 1000m 고원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드넓은 공간이다. 철 따라 갖가지 야생화가 군락을 이룬다는데 겨울이라 볼 수 없어 아쉽다.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기 전에는 배추밭 등으로 이용되었고, 그 이전에는 화전민들이 살던 곳으로 알려진다.

화전민, 전란, 수탈, 재해 등으로 농경지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산속으로 들어가 불을 놓고 그 땅을 경작해서 생계를 유지하던 사람들이다. 화전민들이 겪어야 했던 애환이 고려가요 청산별곡에 생생하게 드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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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인 학살 장본인이 처벌 대신 ‘훈장’ 받은 셈이네요”

엊저녁까지는 추위가 매섭더니 하룻밤 사이에 봄날이 됐다. 어제만 해도 렌터카의 앞 유리창에 얼음알갱이를 벗겨내느라 출발이 지체되었는데, 오늘은 성에조차 끼지 않았다. 날씨는 따뜻하고 하늘은 가을의 한 날처럼 높았다. 지리산 자락을 답사하는 데 안성맞춤일 듯싶었다.

어제는 대전과 대구라는 대도시에 인접한 골령골과 경산 코발트 광산 학살터를 답사했다. 찾는 이 아무도 없는 을씨년스러운 그곳에서 진상규명의 절실함과 시급함을 아이들과 공유했다. 이제 만시지탄일지언정 진상규명 후 정부에 의해 추모공원이 조성된 두 곳을 답사할 차례다.

‘박정희’란 이름은 어디에

거창 사건 추모공원에 가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 거창은 우리나라에서 바다로부터의 거리가 가장 먼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그만큼 심심산골이라 6.25 전쟁 전후 빨치산 활동의 주요 거점이 됐다. 거창을 비롯한 지리산 자락 곳곳에서 민간인 학살이 자행된 것도 그래서다.

추모공원은 거창군 신원면 소재지에서 500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다. 719기의 묘비가 자리한 터 옆으로 위패 봉안각과 역사교육관 등이 세워져 있어 참배객을 맞는다. 추모탑과 광장, 주차장 등을 포함하면 규모가 상당하다. 걸어서 다 돌아보려면 족히 한두 시간은 필요하다.

그런데, 거창 사건의 진실에 다가서려면 추모공원보다 먼저 들러야 할 곳이 있다. 박산골 학살터와 탄량골 학살터, 거창 사건 희생자들이 한꺼번에 묻힌 옛 묘역 등을 참배한 뒤 추모공원에 찾아가는 동선이 맞춤한다. 신원면 소재지 전체가 학살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어서다.

주민 수백 명을 한데 모아놓고 무자비하게 학살한 현장이 마을을 감싸고 있는 형국이다. 놀랍게도 마을 이름이 신원(神院)이라는 점마저 소름이 끼친다. 직역하면, ‘귀신들의 집’이라는 의미 아닌가. 1914년 주변 마을이 통합되면서 생겨난 이름이라지만, 수십 년 뒤의 일을 예언이라도 한 것처럼 공교롭다.

박산골에는 학살 당시 국군이 쏜 총탄 자국이 여러 바위에 그대로 남아있다. 시신은 차곡차곡 쌓여 불태워졌고, 훗날 누구의 유골인지 확인할 길이 없어 대강 남자와 여자, 아이들 것을 구분한 뒤 한데 묻었다. 그곳이 세 봉분만 덩그러니 남은 거창 사건의 옛 박산골 묘역이다.

남자묘, 여자묘, 소아묘가 따로 조성된 박산골 묘역에는 거창 사건이 후대 어떻게 여겨졌는가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이 있다. 부서지고, 넘어지고, 새겨진 글자조차 정으로 쪼아댄 위령비가 그것이다. 5.16 군사 정변 직후 정부는 거창 사건 희생자 유족회를 반국가단체로 낙인찍고 탄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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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 해인사 아래 부음정에 가다

월요일, 보통의 직장인들은 가장 싫어하는 요일이다. 오죽했으면 월요병이라는 말까지 생겨났을까. 그러나 나에게 있어 월요일은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으로 만들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회이다. 이럴 때 옛날 선비라면 멀리 있는 벗을 찾아 몇 날 며칠 머물며 술과 함께 시문과 정세를 논하였을 것이다. 술과 문장 그리고 혼탁한 정세에 대해 묻고자 길을 나섰다.

집에서 한 시간 거리의 합천 해인사, 몇 번이나 왔었지만 이번에는 사찰과 소리길 걷기가 목적이 아니다. 그동안 몰랐던 장소가 있다. 관심에 따라 보는 것은 달라진다. 가야면 소재지인 야천리, 대장경기록문화테마파크가 있고, 소리길 출발점으로 주차장이 있다. 그런데 큰길에서 바로 보이는 부음정을 그동안 알지 못하고 지나쳐서 이번에는 순전히 여기를 목적지로 삼았다.

부음정(孚飮亭)은 남명 조식의 수제자인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 1536-1623)이 45세 때인 선조 13년(1580)에 학문을 닦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세웠다. 사람에 대한 평가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것도 역사다. 내암에 대한 당대의 평가를 떠나 나는 그의 효성과 강직함, 의리를 좋아한다.

근래에 주역의 괘가 언론에 자주 오르내리고 있다. 64괘 중 가장 좋은 13괘 천화동인(天火同人, 진리를 추구함, 동지를 얻음), 14괘 화천대유(火天大有, 위대함, 하늘 위의 태양)가 그것이다. 반면 내암은 그다지 좋다고 할 수 없는 64괘의 마지막인 화수미제괘(火水未濟卦 ䷿)에서 부음이라는 이름을 가져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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