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인 학살 장본인이 처벌 대신 ‘훈장’ 받은 셈이네요”

엊저녁까지는 추위가 매섭더니 하룻밤 사이에 봄날이 됐다. 어제만 해도 렌터카의 앞 유리창에 얼음알갱이를 벗겨내느라 출발이 지체되었는데, 오늘은 성에조차 끼지 않았다. 날씨는 따뜻하고 하늘은 가을의 한 날처럼 높았다. 지리산 자락을 답사하는 데 안성맞춤일 듯싶었다.

어제는 대전과 대구라는 대도시에 인접한 골령골과 경산 코발트 광산 학살터를 답사했다. 찾는 이 아무도 없는 을씨년스러운 그곳에서 진상규명의 절실함과 시급함을 아이들과 공유했다. 이제 만시지탄일지언정 진상규명 후 정부에 의해 추모공원이 조성된 두 곳을 답사할 차례다.

‘박정희’란 이름은 어디에

거창 사건 추모공원에 가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 거창은 우리나라에서 바다로부터의 거리가 가장 먼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그만큼 심심산골이라 6.25 전쟁 전후 빨치산 활동의 주요 거점이 됐다. 거창을 비롯한 지리산 자락 곳곳에서 민간인 학살이 자행된 것도 그래서다.

추모공원은 거창군 신원면 소재지에서 500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다. 719기의 묘비가 자리한 터 옆으로 위패 봉안각과 역사교육관 등이 세워져 있어 참배객을 맞는다. 추모탑과 광장, 주차장 등을 포함하면 규모가 상당하다. 걸어서 다 돌아보려면 족히 한두 시간은 필요하다.

그런데, 거창 사건의 진실에 다가서려면 추모공원보다 먼저 들러야 할 곳이 있다. 박산골 학살터와 탄량골 학살터, 거창 사건 희생자들이 한꺼번에 묻힌 옛 묘역 등을 참배한 뒤 추모공원에 찾아가는 동선이 맞춤한다. 신원면 소재지 전체가 학살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어서다.

주민 수백 명을 한데 모아놓고 무자비하게 학살한 현장이 마을을 감싸고 있는 형국이다. 놀랍게도 마을 이름이 신원(神院)이라는 점마저 소름이 끼친다. 직역하면, ‘귀신들의 집’이라는 의미 아닌가. 1914년 주변 마을이 통합되면서 생겨난 이름이라지만, 수십 년 뒤의 일을 예언이라도 한 것처럼 공교롭다.

박산골에는 학살 당시 국군이 쏜 총탄 자국이 여러 바위에 그대로 남아있다. 시신은 차곡차곡 쌓여 불태워졌고, 훗날 누구의 유골인지 확인할 길이 없어 대강 남자와 여자, 아이들 것을 구분한 뒤 한데 묻었다. 그곳이 세 봉분만 덩그러니 남은 거창 사건의 옛 박산골 묘역이다.

남자묘, 여자묘, 소아묘가 따로 조성된 박산골 묘역에는 거창 사건이 후대 어떻게 여겨졌는가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이 있다. 부서지고, 넘어지고, 새겨진 글자조차 정으로 쪼아댄 위령비가 그것이다. 5.16 군사 정변 직후 정부는 거창 사건 희생자 유족회를 반국가단체로 낙인찍고 탄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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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이미지 원본 출처 : 오마이뉴스 RSS Feed
전문 보러 가기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895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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