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 태백은 채움, 함백은 비움이더이다

희고 커서 태백(太白)이요, 그 하얌이 다해서 함백(咸白)일까? 백두산에서 지리산을 잇는 한반도의 허리, 동북 산맥과 서남 줄기의 연결점으로서 태백산을 백두대간의 모산(母山)이라고 한다. 인체의 척추에 비유하자면 허리뼈 4번쯤 되지 않을까. 한강과 낙동강의 발원지로서 한반도의 탯줄로서 잉태의 산이기도 하다.

지난 14일, 숱한 이야기로만 듣던 태백산을 올랐다. 눈과 비 소식 탓인지 가는 비와 가는 눈이 조금 스치되 시야는 오리무중이었다. 민족의 영산이라는 풍문만큼이나 ‘날이 개어 웅장한 태백 줄기라도 볼 수 있다면 좋으련만’ 하는 차선과 ‘폭설의 태백을 실컷 만끽하면 더 좋으련만’ 하는 최선이 교차했지만, 이도 저도 아닌 잔뜩 흐릴 뿐…

천제단을 얼마 앞두고선 진눈깨비가 몰아치고 시야가 더욱 좁아지며 비람 또한 세차다. 등산객들의 감탄이 여기저기서 쏟아진다. ‘역시, 태백산’이라며 모두, 태백이 선사하는 풍광에 혼쭐 빠지듯 무아지경에 빠지는 모습이었다.

홀로 뻗은 주목은 변화무상한 질곡의 대자연을 살아 천년을, 죽어 천년을 어찌 버텨 내고 있는 것일까. 벌거벗은 고상목들은 안개, 서리, 비, 눈과 바람이 뒤엉켜 칼날 같은 얼음 갑옷을 두르고선 송곳 바람을 맞서는 듯, 품는 듯 인내의 극한을 한 수 가르친다.

그 와중에 고목을 솜이불처럼 덮은 이끼들은 안개, 서리, 비, 눈과 바람을 맞은 인고의 눈물을 얼음구슬로 승화시킨다. 대자연의 무거움에 겸손이 숨을 쉰다. 거대 태백 줄기를 보는 영광, 흰 눈을 펑펑 맞는 횡재 대신 얼음을 머금은 이끼를 만나는 호사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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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호치민에 가려거든 이거 먼저 보세요

저는 달랏을 뒤로 하고 슬리핑버스에 타고 한참을 달려 호치민 시에 도착했습니다. 교통체증 한가운데에 걸린 버스는 달랏에서 출발한 뒤 열 시간이 넘게 지나서야 호치민에 닿을 수 있었습니다. 벌써 해가 진 지 한참이었지만, 도시의 열기는 꺼질 줄 모르고 있었습니다.

다들 아시는 바와 같이, 호치민 시의 원래 이름은 사이공입니다. 한때 남베트남의 수도였고, 베트남이 통일된 지금에 와서도 베트남 최대의 도시죠. 베트남의 수도는 북부의 하노이고 인구 수도 하노이와 호치민이 비슷한 수준이지만, 각 지역의 총 생산(GRP)을 비교하면 차이가 꽤 뚜렷합니다.

2019년 베트남 통계청의 자료를 보니, 하노이의 GRP는 420억 달러 수준, 호치민 시의 GRP는 617억 달러 수준입니다. 꼭 이런 수치를 보지 않더라도, 고층 빌딩이 늘어선 호치민 시의 도시경관은 하노이와는 분명히 다르게 느껴집니다.

프랑스와 호치민 시

지금 이렇게 거대한 도시가 된 호치민 시도 처음부터 대도시였던 것은 아닙니다. 과거 베트남은 현재의 베트남 북부 지방만을 위주로 한 영토를 가지고 있었고, 시간이 흐르며 남쪽으로 진출해 현재의 베트남을 만들어 나갔습니다. 베트남 중남부 지역에는 오랜 기간 ‘참파’라는, 베트남과는 별도의 왕조가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지금의 호치민 시 지역은 이 참파 왕조의 땅도 아니었습니다. 참파 왕조의 지배를 받은 적도 있지만, 역사상의 대부분의 기간은 크메르(캄보디아)가 지배하던 땅이었죠. 이 지역에 베트남인이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참파가 베트남의 속국이 되고 크메르 역시 약화되었던 17세기 이후의 일입니다.

이후 베트남에 응우옌 왕조가 성립되면서 이 지역이 베트남의 영토로 완전히 편입되죠. 하지만 이 때에도 호치민 시 지역은 여전히 작은 어촌에 불과했습니다. 이 도시가 주목받을 수 있었던 것은 역시 베트남을 지배한 프랑스와 관계가 깊습니다.

1858년 프랑스군은 베트남 중부의 항구도시로, 당시 베트남의 수도였던 후에와 가까이 있던 다낭을 침공했습니다. 하지만 전투는 생각처럼 잘 풀리지 않았죠. 이에 프랑스는 수도와 가까워 방비가 잘 되어 있는 다낭 대신 멀리 떨어져 있는 항구를 공략하기로 합니다. 그렇게 선택된 도시가 사이공이었죠.

사이공에서도 전투는 쉽지 않았지만, 결국 프랑스는 사이공을 완전히 차지하는 데 성공합니다. 1862년 사이공 조약이 체결되며 사이공을 포함한 베트남 남부 3개 주가 프랑스에게 할양되었습니다. 프랑스는 이 곳을 ‘코친차이나’로 부르며 영토를 확장해 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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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트로트가 싫어요, 정말로?

‘쿵짝쿵짝 리듬에 맞춰 야야야야 노래를 해요 / 춤추는 세상 신나는 세상 마음껏 즐겨 보아요 (…) 모이자 트로트 전국팔도 모두 모이자 부르자 트로트 남녀노소 모두 부르자’ 송가인의 노래 ‘트로트가 나는 좋아요’의 일부분이다.

‘울 할머니 등에 업혀 살 때 들려오던 그 노래들 / 아버지 술 한잔 걸치시면 단골 레파토리 / 오오 올드해서 싫어 촌스러운 뻔한 멜로디 (…) 근데 요즘 내가 점점 이상해 아빠랑 똑같아 술만 먹으면 / 내가 이래도 되는지 불러본다 사랑은 얄미운 나비인가 봐’ 임창정이 부르는 ‘나는 트로트가 싫어요’의 앞부분이다.

송가인은 대놓고 트로트 예찬을 한다. 임창정은 트로트를 싫어했는데, 어느새 하늘에 목놓아 꺾어 부르고 있다고 고백을 한다. 트로트 열풍이 거세다. 임영웅, 영탁, 장민호가 계보를 잇고 있다.

이미자와 함께 한국 트로트계를 주름잡았던 ‘국보급 가수’ 하춘화와 엮이는 전남 영암으로 간다. 신나는 트로트 음악을 듣고, 월출산의 기(氣)도 받을 수 있는 곳이다. 하춘화의 노래 기념비도 있고, 트로트 가요센터도 있다.

트로트 가요센터는 트로트를 테마로 한 박물관이다. 우리나라 대중가요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1층은 193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한국 트로트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는 역사관과 명예의 전당으로 이뤄져 있다. 2층은 하춘화전시관이다. 각종 LP와 카세트테이프, CD 그리고 공연 의상과 사진, 영상과 팸플릿을 통해 하춘화의 생애를 보여준다.

하춘화는 ‘영암아리랑’ ‘잘했군 잘했어’ ‘날 버린 남자’ ‘사랑이 야속하더라’ ‘항구의 여자’ 등 수많은 히트곡을 냈다. 6살 때인 1961년 ‘효녀 심청 되오리다’로 데뷔했다. 지금까지 무려 2500여 곡의 노래를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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