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관광지도가 알려주지 않는 유서 깊은 장소

새 시대는 바닷길로 왔다.그 새 시대를 우리는 이제 근대라고 부른다. 한반도에서 근대의 첫 파도를 맨 몸으로 올라탄 도시 중의 하나가인천이었다. 강화도조약 후 부산(1876), 원산(1880)에 이어 개항된 인천(1883)은 ‘근대화’라는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시간을 준비도 없이 맞아야 했다.

개항이 되자 조선을 호심탐탐 노리던 일본과 청나라가 재빠르게 들어왔고 영국과 프랑스, 미국 등의 서강도 예외가 아니었다. 조선의 대표 개항도시답게 인천역 일대에는외세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었다.

특히 일본인과 중국인들의 거주지는 영화 세트장에라도 들어와 있는 듯 근대가 재현되어 있었다. 옛일본은행거리는상하이 와이탄을일부떼어놓은듯 했다.인천시에서는 조계지일대를개항거리라 명명하고근대건축물들을 말끔히단장해 놓았다.

인천 여행을 하려는 사람이 만약 내게 묻는다면 다음의 코스로 돌아보길 권하겠다.

(1) 동인천역에서 자유공원까지
동인천역-답동성당-내리교회-성공회 내동교회-홍예문-자유공원-제물포구락부
(2) 일본 조계지
인천부청사(현 중구청)-일본제58은행 인천지점(현 중구요식업조합)-일본제18은행 인천지점(현 개항장근대건축전시관)-일본제1은행 인천지점(현 인천개항박물관)-대불호텔전시관-일본우선주식회사 인천지점(현 아트플랫폼 사무동)-인천하역창고(현 아트플랫폼)-대화조사무소(현 카페 팟알)
(3) 청나라 조계지
청일조계지계단-한중문화관-짜장면박물관(구 공화춘)
(4) 인천여행 심화편
신포역-인천신사터(현 인천여상)-묘각사터(구 일본사찰)-해광사(구일본사찰)-율목도서관(구 일본인별장)

인천 원도심과 개항거리는 안내가 잘 되어 있으므로 표지판을 보고 따라다니면 된다. 그러나인천신사와 묘각사 및 해광사, 적산가옥인 일본인 별장은 표지판은 커녕 인천관광지도에서도 알려주지 않는 곳들이다. 근대 거리를 섭렵한 후 자기주도적으로 찾아가야 하므로 ‘인천여행 심화편’으로 붙여봤다.

미리 밝혀 두지만 막상 어렵게 찾아가 봐도 별로 볼 것은 없다. 이 대목에서 유홍준교수의 ‘답사여행의 최고 경지는 절터 답사’라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

인천신사의 흔적을 찾아

당연히 인천의 일본인 거주 구역에는 신사(神社)가 있었다.현재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가 인천신사 터였다. 언덕 높은 곳에 학교 건물이 서 있었다. 인천 앞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고(高) 지대다. 역시 시가지와 바다 전망이 동시에 확보되는 곳에 자리 잡는 해변 신사의 위치공식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부산의 용두산신사, 목포의 송도신사, 포항의 구룡포신사처럼.

정문 계단을 올라 교정에 들어서니 석물 몇 개가 눈에 띄었다.신사의 상징인도리이로 보이는 돌기둥 두 개가 대칭적으로 서 있었고 석등도 하나 발견했다.자세히 보니 일본식 석등이다. 옥개석의 끝이 고사리새순처럼 말려 올라간’가스가(かすが)석등’이다. 일본 나라(奈良)의 가스가신사(春日神社)에서 시작되어 유행한 석등 양식이라고 한다.

전봉준 장군의 가묘인 단소(壇所)에 설치되어 있다가 일본식 석등임이 밝혀져 후에 철거(2013)되는 소동을 빚은문제의 그가스가석등이다.그 외에도신사 유구(遺構)로 보이는 돌들이 바닥에흩어져 있었다.신사는 헐렸지만 학교 뜰에 신사 흔적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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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이미지 원본 출처 : 오마이뉴스 RSS Feed
전문 보러 가기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892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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