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이념을 놓지 못하는 사람들

자그레브에서 세르비아 베오그라드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습니다. 주로 기차를 이용했던 덕에, 장거리 버스에 타는 것이 꽤 오랜만이었습니다.

버스는 서너 시간을 달려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사이 국경에 닿았습니다. 그간 유럽의 여러 나라를 오갔지만, 지금까지는 모두 쉥겐 협정에 가입해 서로 국경을 개방하고 있는 국가들이었습니다. 입국 심사를 받는 것도 프랑스 이후 처음입니다.

세르비아 입국 심사를 받으며, 국경에 잠시 서 있다가 깨달았습니다. 여기서는 더 이상 유럽연합의 깃발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세르비아는 유럽연합 회원국이 아니니 당연한 일이죠. 하지만 왠지 먼 길을 나온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꼭 유럽연합의 깃발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세르비아는 이제까지 거쳐 온 유럽 국가들과는 여러 면에서 달랐습니다. 일단 중앙아시아를 떠난 뒤 한동안 보지 못했던 키릴 문자부터 눈에 띄기 시작했습니다. 도시의 분위기에도 분명 이질적인 느낌이 있었습니다.

역사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세르비아부터 발칸반도의 중동부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오랜 기간 받았으니까요. 한때 세르비아 제국을 세웠던 세르비아도 1459년부터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 들어갔습니다.

세르비아가 독립을 되찾은 것은 19세기 후반의 일입니다. 오스만 제국의 라이벌,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독립국을 세우는 데 성공했죠. 그리고 이후 세르비아는 발칸반도의 패권국가로 성장해 나갑니다.

물론 패권이란 언제나 전쟁과 정복을 전제로 한 것이었습니다. 발칸 반도에서는 20세기 초반 두 차례의 ‘발칸 전쟁’이 벌어졌죠. 세르비아 역시 이 발칸 전쟁의 주역이었습니다. 세르비아 안에서는 발칸 반도의 슬라브인을 모두 통합해야 한다는 ‘범 슬라브주의’가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그 대표적인 표적이 바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었습니다.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를 받는 슬라브계 민족들까지 모두 통합하고자 했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는 일부 세르비아계도 살고 있었고, 보스니아계, 크로아티아계 등 슬라브인이 다수 거주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이 ‘범 슬라브주의’를 주장하던 한 세르비아계 청년이 1914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부부를 암살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것이 ‘사라예보 사건’이었습니다. 세계 1차대전의 시작이었죠. 사건은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벌어졌지만, 그 본질은 세르비아와 오스트리아 사이의 충돌이었습니다.

1차대전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패배로 끝났습니다.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지배하고 있던 슬라브인들을 모두 통합하는 데 성공했죠. 그렇게 유고슬라비아 왕국이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범 슬라브주의’라는 미명 하에 만들어진 왕국은 그리 원활하게 운영되지는 않았습니다. 세르비아를 중심으로 구성된 유고슬라비아에서, 다른 슬라브계 민족들의 불만은 커질 수밖에 없었죠. 유고슬라비아는 범 슬라브주의가 아니라 세르비아의 패권주의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나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2차대전이 벌어졌습니다. 슬라브 민족은 분열했죠. 한때는 크로아티아인이 나치 독일을 등에 업고 세르비아인에 대한 인종 청소를 자행하기도 했습니다. 반대로 세르비아인 게릴라들도 크로아티아인 학살에 나서기도 했죠.

전쟁은 독일의 패전으로 끝났습니다. 발칸 반도에는 다시 유고슬라비아가 세워졌죠. 이번에는 사회주의 국가인 유고슬라비아 연방이었습니다. 그간 독일 지배에 저항했던 파르티잔 지도자, 티토가 유고슬라비아의 정권을 장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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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이미지 원본 출처 : 오마이뉴스 RSS Feed
전문 보러 가기 :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966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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