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균 30년지기 절친이었던 여배우, 비통한 심경 토로… 모두를 눈물짓게 했다

배우 문정희가 삼십년지기인 이선균을 떠나보내며 남긴 글이 여럿의 마음을 울리고 있다.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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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달’ 이경규, 이소룡 때문에 전 재산 날린 사연? (과몰입 인생사)

(엑스포츠뉴스 이창규 기자) ‘과몰입 인생사’ 이경규가 이소룡의 인생사를 전한다.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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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망 뒤 끌려가는 가족들, 셋째왕자만 이 섬에 피했다

흑산도는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한·중 해로(海路)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섬이다. 중국 사신들이 머무는 관사 터와 사신의 입경(入境)을 알리는 봉수대의 존재는 읍동마을이 한중 해로에서 핵심적인 거점 포구였음을 알려준다.

<흑산도 아가씨> 노래비가 서 있는 상나리 고개에서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면 상라산(높이 226m) 정상에 고대의 제사 유적이 남아 있다. 지금은 관광객들이 오르내리는 전망대가 되었다. 2010년 발굴조사 때 지표와 암반층 사이에서 통일신라 시대 토기편과 철제마(鐵製馬) 7점, 토제마 1점을 비롯해 조질(粗質)청자류 흑유자기(黑釉磁器) 등 다량의 고려시대 자기편이 출토됐다. 제사를 지냈던 방향은 유물의 출토 지점으로 보아 북동쪽을 향하고 있었다.

철마 신앙은 위험한 항해 활동에 종사하는 뱃사람들이 안전을 기원하는 고대 해양 신앙. 전남 연안과 도서 지방의 제사 터에서도 철마가 많이 발견됐다. 상라산 제사 터는 통일신라 시대부터 고려 시대까지 사용한 유적이다. 고려 말기부터 주민을 육지로 이주시키는 공도(空島) 정책을 쓰면서 상라산 제사는 사라졌다.

당나라 향하는 길목에 있던 흑산

제사 터 유적에서 50m 아래로는 봉수대가 복원돼 있다.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나오는 봉수대다. 중국 사신의 입국 또는 주변 섬들 사이에 긴급 상황을 알리는 기능을 했다. 봉수대 아래로는 읍동마을에서부터 꾸불꾸불 기어 올라오는 상나리고개 열두 굽이 길이 아찔하게 내려다보인다.

읍동마을 뒷산에 조성된 산성은 상라산(上羅山)의 북쪽 능선에 있다. 지형적으로 건물지 양쪽이 암벽으로 둘러싸여 외부에서는 보이지 않으나 산성에서는 해로를 감시할 수 있다. 규모가 작고 우물터가 없는 것으로 보아 외적을 방비하는 기능보다는 바다를 조망하고 봉수대를 관리하는 임무가 주였을 것이다.

중국사신 관사 터는 상라산에서 뻗어내린 해발 약 7~9m의 지대에 자리한 구릉 끝에 있다. 일명 해내지골로 불렸다. 주춧돌, 적심(積心), 기단(基壇), 석열, 축대 등 유구(遺構)가 남아 있다. 전체 건물의 규모가 남북으로 26.4m 동서로 11.7m. 정면 초석간 거리는 4.4m. 자연석이나 막돌이 아닌 상면을 잘 다듬은 초석을 사용했고 100×90cm로 큰 편에 해당한다.

남송에서 고려를 오가던 중국 사신이 묵던 곳이다. 몇 차례에 걸친 발굴조사에서 평기와, 막새, 명문(銘文)기와, 자기, 도기, 중국 동전 등이 나왔다. 이 중 능성군와초제8대(陵城郡瓦草弟八隊)라는 명문은 이 건물의 기와를 제작한 곳을 가리킨다.

능성군은 현재 전남 화순 능주의 옛 명칭. 자기류는 청자가 주류이고 대접 접시 병 등이 출토됐다. 중국 남송대(1127~1279) 자기도 함께 출토됐다. 중국 자기와 더불어 발견된 중국 동전 가우통보(嘉祐通寶)와 희령원보(熙寜元寶)는 11세기인 송나라 인종 신종 연간에 주조된 것으로 건물의 운용 시기와 기능에 단서를 제공하는 유물이다.

발굴조사를 마친 뒤에는 유구를 흙으로 덮어두어 지금은 잡초가 무성하다. 몇백 년 묵은 후박나무 한 그루가 중국사신 관사 터를 오래도록 지키고 있다.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도 흑산도 관사터와 봉수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1123년 송나라의 국신사(國信使) 일행으로 고려에 와서 3개월 간 고려방문 일정과 체류 기간에 보고들은 정보를 글과 그림으로 세세히 서술했다.
흑산은 백산의 동남에 있어 바라보일 정도로 가깝다. 처음 바라보면 극히 험준하고, 바싹 다가가면 산세가 중복돼있는 것이 보인다. 앞의 한 작은 봉우리는 가운데가 굴같이 비어있고 양쪽 사이로 바다가 들어가 있는데(灣入), 배를 감출 만하다. 옛적의 해정(海程)에서 사신선이 머무른 곳으로 관사(官舍)가 아직 남아 있다. 그런데 이번 길에는 여기에 정박하지 않았다. 주민이 사는 취락이 있다. 나라 안의 대죄인으로 죽음을 면한 자들이 흔히 이곳으로 유배돼 온다. 중국 사신선이 이르렀을 때 밤이 되면 매번 산마루에 봉화불을 밝히고 여러 산들이 서로 호응해 왕성(개경)에까지 이르는데, 이 일이 이 산에서 시작된다. -고려도경 제35권, 해도(海道) 흑산조(黑山條)-

서긍은 명주(明州) 닝보(寧波)에서 출발해 흑산도 근처를 지나 서해를 따라 북상해 개경에 이르는 항로를 거쳤다. 해정(海程)이라는 옛 표현을 쓴 것으로 보아 흑산도가 통일신라 시대부터 국가의 중요한 관문 포구로 기능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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