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국수를 먹으며 떠올린 베트남 친구

얼마전 하노이를 방문했다. 하노이에서 살다 떠난지 8년 만이다. 공항 밖으로 나오자 특유의 익숙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베트남 음식에 들어가는 팔각, 정향, 후추 등의 향신료가 공기 중에서 미세하게 뒤섞여 나는 냄새다. 도로변 키작은 나무에서 재스민 꽃향기가 아스라이 흘러나왔다. 향신료 냄새와 아열대 꽃향기는 내 기억속의 전형적인 베트남 냄새다. 비로소 베트남에 왔다는 자각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숙소를 나와 택시를 타고 예전에 살던 동네로 갔다. 단골 식당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들어가서 쌀국수 분지에우꾸아(Bún Riêu Cua, 게살 국수)를 시켰다. 그동안 식당 인테리어도 바뀌고 직원들도 바뀌고 음식을 담아내는 식기류도 바뀌었다. 바뀌지 않은 건 음식 뿐인가.

쌀국수에 라임 두 조각을 짜 넣고 칠리소스와 매운 고추 몇 조각을 넣었다. 수저로 국물을 떠서 입안에 넣자 오묘한 국물 맛이 느껴졌다. ‘그래 이 맛이야’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쌀국수가 들어가자 지난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차 한 잔의 맛으로 무수한 과거 나날들을 되살린 것처럼, 나는 베트남 친구 한 명을 떠올렸다.

친구는 베트남 화가들 그림을 주로 외국인에게 중개해주는 미술상이다. 황티응옥(Hoàng Thị Ngọc)이 그녀의 이름이다. 나보다 열 살 더 많은 그녀를 나는 응옥이라 불렀다. 응옥은 1980년대 말 하노이에서 최초로 오픈한 아트갤러리에서 일하다 프리랜서로 일한 지는 20년이 넘었다.

그녀를 떠올린 이유는 내가 하노이에 살 때 많은 것을 빚졌기 때문이다. 친구에게 무람없이 책을 빌려읽듯 베트남 미술사나 베트남 화가들 책을 수시로 빌려 읽으며 나는 낯선 도시에 사는 외로움을 달랠 수 있었다.

쌀국수에 들어간 토마토와 허브야채들을 국물과 같이 떠먹었다. 감칠 맛이다. 두 세 번 연거푸 먹었다. 속이 편안해졌다. 응옥 이야기를 계속 해보자. 응옥은 나를 볼 때마다 궁핍했던 1960년대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나를 끌고 베트남미술관에 데려가 프로퍼갠더(propaganda, 선전) 포스터들을 앞에 두고 여러 이야기를 해주기도 했다.

예술을 정치화하는 사회주의 리얼리즘(Socialist Realism)은 소련에서 태어났다. 1932년에서 1988년까지 소련의 공식 예술을 담당한 이 사조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모든 공산권 국가에서 채택되어 꽃을 피웠다.

베트남에서는 1954년에서 1975년까지를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우세했던 시기로 본다. 작품속 대상은 늘 미래를 지향하는 표상이 되어야 한다. 밝게 웃는 모습이나 함께 싸우는 전사 이미지를 보여야 했으므로 슬픈 얼굴이나 우울한 장면을 연출하면 즉시 체제비판으로 간주되어 엄벌을 받았다. 이 시기는 예술인이 국가를 위해, 국가가 주문하는 작품을 만들어내는 공무원으로 존재했던 시절이다.

응옥과 베트남미술관에서 포스터들을 둘러보면서도 나는 아무런 흥미를 느끼지 못했는데, 부르주아 숙녀처럼 새하얀 얼굴에 우아한 연꽃을 든 저 프롤레타리아 혁명 여전사 모습이 전혀 혁명적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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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이미지 원본 출처 : 오마이뉴스 RSS Feed
전문 보러 가기 :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083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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